Melody H88A Signature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업그레이드된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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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몇 해 전까지 진공관 앰프의 베스트셀러로 많은 애호가들을 사로잡았던 H88A 시그너처가 다시 국내 시장에 돌아온 것이다. 신형으로 바뀌었나 물어 보았더니 부분 변경만 좀 있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긴, 모델 이름이 똑같은 걸 보니 별로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많은 메이커들이 제품을 약간 수정하고서 MK2니, 레퍼런스니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이전 제품과 차별화시키고 가격도 올리는 몹쓸 버릇들을 갖고 있었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H88A 시그너처는 꾸준히, 그리고 조금씩 변경되어 왔다. 2005년 무렵 국내에 맨 처음 출시되었던 모델도 완성도에서 흠을 잡기는 힘들었지만, 스피커 단자가 변경되었고, 전원부 바이패스 커패시터로 비마 커패시터가 추가되었으며, 출력관의 바이어스 저항도 산화 금속 저항을 두 개 쓰던 것이 대용량 권선 저항으로 변경되는 등, 그 사이에 보이지 않게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모델 이름은 한결 같았다. 이렇게 적지 않은 변경에도 동일한 모델명을 고수했던 이유는 H88A 시그너처가 애호가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서 (현대차가 소나타나 그랜저라는 모델명을 그토록 오랫동안 사용하는 것처럼) 인지도를 활용할 목적도 있었겠지만, 제품의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철저한 하드 와이어링이나 호블랜드 뮤지캡 커패시터, 24스텝 고정밀 어테뉴에이터, 세라믹 소켓과 같은 고급 부품들이 한결 같았고, 무엇보다 회로 자체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제품은 좀 다르다. 외관은 전작과 거의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앰프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사용된 진공관부터 출력관인 KT88을 빼면 모두가 새로운 것으로 변경되었다. 12AX7이 쓰였던 초단관 자리는 영국산 XF184(3EJ7)로 바뀌었고, 6SN7이 쓰였던 드라이브 관 자리에는 RCA(오리지널) 6BA11이 꽂혀 있다. 진공관만 바뀐 것이 아니냐고? 중요한 것은 XF184라는 진공관은 3극관이 아니라 5극관이라는 사실이다.

Melody H88A Signature 이미지 2

6BA11도 하나의 관에 3극관과 5극관이 함께 들어 있는 구조이니 그동안 12AX7과 6SN7, 즉 3극관만으로 구성되었던 구동 회로가 이번에는 5극관으로 5극관을 구동하는 새로운 회로로 완전히 바뀐 것이다(보통 5극관으로 5극 출력관을 구동하게 되면 힘이 좋고 풍성한 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며, 실제로 6V6과 같은 출력관을 드라이브 관으로 사용한 앰프도 있다). 이 정도의 변화라면 모델 이름을 새로 짓거나 최소한 모델 이름 뒤에 MK2가 붙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H88A 뒤에 붙은 시그너처라는 접미사가 이미 어떤 절대적인 경지를 의미하고 있으니 함부로 MK2라는 것을 달기가 민망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자동차처럼 ‘All New~’를 앞에 붙여보면 어떨까? 사용된 진공관의 형식이 바뀌었으니 내부도 크게 변화했을 것은 자명하다. 바닥을 열어보니 역시 눈에 확 들어오는 결정적 변화가 있다. 그것은 진공관 앰프뿐 아니라 반도체 앰프에서도 음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커플링 커패시터의 교체다. 이번 제품에는 데뷔 때부터 한결같이 고수해왔던 호블랜드 뮤지캡이 빠지고 멀티캡 PPMFX 커패시터가 사용되었다. 요즘에는 테플론 커패시터니 실버 포일 커패시터니 해서 가격이 100만원이 넘는 커패시터들도 간간히 보이고 수십만 원대의 커패시터들도 흔히 볼 수 있지만, 메이커의 양산 제품이라면 호블랜드나 멀티캡 정도면 가히 최고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호블랜드와 멀티캡은 취향에 따라 의견이 갈리므로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커플링용 커패시터로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최고 수준의 커패시터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호블랜드와 멀티캡을 비교하면 멀티캡 쪽이 좀더 명확하고 현대적인 소리를 내는 경향이 있는데, 전작이 호블랜드 뮤지캡 네 개와 자사의 로고가 박혀 있는 필름 커패시터 두 개를 커블링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신작은 멀티캡 PPMFX 커패시터만 6개를 쓴다.

다른 변경도 적지 않다. 우선은 중앙에 자리했던 릴레이와 보호 회로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 보호 회로라는 것이, 있어서 안심되는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중요한 출력부에 음을 열화시킬 수 있는 접점을 둔다는 점에서 빼고 싶은 경우도 많은 것이다. 게다가 출력 트랜스가 있는 진공관 앰프의 경우에는 굳이 보호 회로를 쓰는 것이 득이 될지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멜로디에서는 그동안 오래도록 H88A 시그너처를 판매해오면서, A/S에 관련된 경험에 의하여 보호 회로의 유용성에 대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을 것이다. 음질의 측면, 그리고 오래 사용할 경우 릴레이 접점의 내구성을 고려하면 분명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보호 회로가 없어도 안심하고 쓸 수 있는 회로를 구성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외에 사용된 진공관이 바뀌었기 때문이겠지만, 전원부도 변경되었다. 트랜스 2차 권선에서 나온 출력을 브릿지 다이오드로 정류하는 것은 다른 제품과 동일한데, 브릿지 다이오드가 네 개나 보인다(전작은 세 개). 보통은 브릿지 다이오드를 B전압용과 히터용으로 나누어 정류하고 각 단의 전원은 저항으로 감압하여 공급하는데, 본 제품은 브릿지 다이오드 세 개가 서로 다른 고전압을 만들어 내고 하나가 히터용으로 사용된다.

Melody H88A Signature 이미지 3

전원부는 앰프에서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니, 이렇게 단별로 독립적으로 정류하는 것은 분명히 음질에는 이득이 될 것이다. 참으로 성의 있는 만듦새가 아닌가 한다. 전원부를 강화하려는 의도는 와이어링에서도 느껴진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전원 인렛에서 파워 스위치로 연결되는 배선이다. 익스팬더를 씌워 놓았는데 무척 굵다. 굵어도 너무 굵어서 과연 이렇게 해야만 할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만든다. 아마도 이 선재를 본 애호가라면 최소한 이 앰프에 아무 전원선이나 쓰지는 못할 것 같다.

전원 스위치도 일반적인 로터리 스위치보다는 너무나 커서 대용량 서킷 브레이커로 보이는데, 수축 튜브로 감싸 놓아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전원트랜스 2차 권선에서 나온 선들은 용처 별로 색선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전 제품보다 굵은 선들이 사용되어 있으며 정갈하게 꼬아서 배치했다. 하드 와이어링 기술은 처음보다 더욱 완벽해졌다는 인상이어서, 혹시 같은 기술자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하면서 점점 숙달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보면 볼수록 완벽한 와이어링이다. 고전압부에서는 부품의 리드선까지 깔끔하게 감싸놓은 모습, 전원선들을 난연성 섬유로 감싸놓고 구획별로 깔끔하게 정돈해 놓은 모습, 입력선들을 하나의 슬리브 안에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모습을 보면 도저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공관 소켓은 모두 세라믹으로 만든 고급 제품이고 와이어링에 사용된 러그들까지 모두 세라믹이다. 혹시 진공관 앰프의 자작을 즐기는 애호가라면, 이 앰프의 내부를 보고 선 처리뿐 아니라 부품의 선정이나 배치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스펙도 다소 변경되었을 것 같아 매뉴얼을 펼쳐보았다. 사용된 진공관은 전술한 바와 같이 XF184(3EJ7) 두 개에 6BA11 네 개, 그리고 KT88 네 개다. 출력은 AB급으로 50W로 동일하고 주파수 특성도 20Hz-30kHz로 동일. 입력 감도도 380mV로 동일하다. 치수는 동일하고 무게는 30kg으로 약간 무거워졌으며 S/N비는 THD 3% 기준에 88dB로 다소 줄었다(전작은 1% 기준에서 90dB). 입력 임피던스가 100kΩ으로 전작인 250kΩ에서 크게 낮아진 것이 눈에 띄는 변화인데, 100kΩ이 되었다면 현대 앰프에 있어서 표준적인 입력 임피던스로 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옛날보다 소스기기가 월등히 좋아졌으므로 요즘 반도체 앰프들은 대개 50kΩ을 많이 쓴다). 한편 입력 임피던스가 변했다면 볼륨의 저항 값이 변한 것이므로 멜로디가 자랑하는 24스텝 어테뉴에이터가 새롭게 설계되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외관은 변화를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아주 조금 변했다. 노브의 형상이 약간 변했고 트랜스포머 케이스의 곡률이 줄어 각이 잡힌 정도가 눈에 띄는 변화다. 전면 패널의 폰트도 입력 단자를 표시하는 글씨가 CD, Tuner 등에서 단순한 숫자로 바뀌었고 폰트도 조금 변했다.

뒷면의 단자가 바뀐 것은 중요한데, 스피커 단자는 플라스틱 실드가 없는 단순한 타입에 금도금 형으로 바뀌었고, 입력 단자는 미국 CMC 사 제품으로 변경되었다. CMC 단자들은 프랑스의 자디스에서도 즐겨 쓰고 있는 고급 부품이다. 이제 소리를 듣는다. PC와 아톨 DAC100, 동원할 수 있는 대로 인피니티의 북셀프 스피커, 레가 RS7, 로소 피오렌티노 피에졸 등의 스피커에 물리며 들어 보았다. 우선 전원을 넣고 귀를 스피커에 바짝 대보았다. 진공관 앰프에서 흔히 발생하는 험이나 잡음에 대한 테스트다. 지금 켜져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해볼 정도로 험이나 잡음이 없이 조용하다. 스피커의 그릴을 벗기고 머리카락이 스피커 유닛에 닿도록 다가서기까지 했는데, 이 정도면 정말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약간의 웜-업 후에 첫 곡으로 들어 본 것은 안토니오 포르치오네의 [Touch Wood] 음반에서 ‘Tango Suite’. 기타 줄 뜯는 소리와 울림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허공으로 톡톡 튀어나오는 느낌이 여간 상쾌한 것이 아니다.

스펙에서 S/N이 전작보다 줄어서 조금 걱정했는데, 일본의 모 평론가가 이야기했던 ‘청감상의 S/N비’라는 말이 연상되었다. 스펙에서 숫자는 말 그대로 숫자일 뿐이었다. 배경이 투명하기 때문에 섬세한 고역이 잘 살아나고 쭉쭉 뻗으면서 무대도 넓다. 저역은 단단하고 탄력이 있으며 생동감이 뛰어나다. 첼로 줄 긁히는 소리가 서늘한 것이 애호가들에게 ‘이 맛에 오디오 한다’라는 말을 자주 입에 담게 만들 것 같다. 결론을 내자. 멜로디의 베스트셀러였던 H88A 시그너처가 몇 년 만에 다시 돌아왔는데,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서 왔다. 전작 H88A 시그너처가 갖고 있던 장점들 - 호화로운 부품과 감동적인 하드 와이어링, 공들인 외관은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소리는 더 섬세하고 명확하여 현대적인 하이엔드 음이 되었고, 무엇보다 힘이 좋아졌다는 점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이 시원하고 상쾌한 소리는 단순히 입력 단자나 커플링 커패시터를 바꾸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XF184나 RCA 6BA11과 같은 5극관 때문도, 보호 회로의 배제나 철저한 와이어링 또는 전원부의 개량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품보다는 회로, 회로보다는 밸런스 감각인 것이다. H88A 시그너처가 들려주는 이 멋진 음은 바뀐 회로와 함께 모든 구성 요소들이 조화롭게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진공관 앰프는 쌀쌀맞은 디지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음악 애호가, 오디오 애호가들에게 그리운 시절의 따듯한 위안을 전해주는 다정한 동반자 역할을 해줄 것이다. 한참 동안 이 음악 저 음악을 듣다보니 해가 저물었다. 처음 보는 미니어처 5극관 XF184의 불빛이 참으로 아름답게 비친다. ‘이 맛에 진공관 앰프를 쓰는 거야’ 혼자 중얼거렸다. 아마도 한 동안 All New H88A 시그너처와 열애에 빠져야만 할 것 같다.

Melody H88A Signature

  • 수입원
    헤르만오디오 (010)4857-4371
    가격
    275만원
    사용 진공관
    KT88×4, 6BA11×4, XF184(3EJ7)×2
    실효 출력
    50W
    주파수 응답
    20Hz-30kHz
    입력 임피던스
    100kΩ
    출력 임피던스
    4Ω, 8Ω
    입력 감도
    380mV
    S/N비
    88dB 이상
    THD
    3%
    크기(WHD)
    43×18.5×38cm
    무게
    30kg
글 최상균
제공 월간 오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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